[문화칼럼] 교회에서 금지된 악마의 악기, 클래식의 이단아 ‘색소폰’

[문화칼럼] 교회에서 금지된 악마의 악기, 클래식의 이단아 ‘색소폰’

[문화칼럼] 교회에서 금지된 악마의 악기, 클래식의 이단아 ‘색소폰’

한 때 찬양에 쓸 수 없는 화음(Chord)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금은 대중음악은 물론이고 종종 찬양에도 등장하는 화음이지만, 과거에는 ‘증4도’라는 음정의 간격을 악마의 화음이라며 금지했다. 다장조를 기준으로 도와 파#의 소리인 증4도 음정은 청각적으로 불안하고 불협화음의 대표였던 터라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신학자들과 음악인들은 그 화음을 기피하고 찬양에는 쓰여선 안 되는 화음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늘 익숙함 가운데 새로움을 갈망하는 법. 기존 음악의 형식에서 독특한 개성을 더해주는 증4도 음정은 곧 음악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화음이 됐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찬양에도 슬며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 재즈가 태동하기 시작하면서 증4도는 그저 하나의 개성 있는 화음일 뿐, 더 이상 악마의 화음이라 부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19세기에 목관악기의 섬세한 표현력과 금관악기의 음량을 갖춘 새로운 악기가 개발된다. 그 악기가 바로 오늘의 주제인 색소폰이다. 클래식에서 새로운 역할의 주역이 되길 바라며 만들어진 색소폰은 되려 클래식계의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됐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미 오케스트라의 구성이 정리가 된 19세기에 새로운 악기가 들어올 자리가 만들어지기란 쉽지 않았을 거란 의견이 가장 많다. 본래 인류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이는 기성세대는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클래식의 이방인은 교계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색소폰이 재즈를 만나면서 시작됐을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태동하여 20세기에 꽃 피우기 시작한 새로운 음악 세계인 재즈는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의 간절함과 결합하여 기존의 이론과 음악적 구조를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었다. 이런 재즈는 클래식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색소폰과 만나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것은 보수적인 교회 문화와 정서에는 꽤 충돌하는 것으로 느껴졌을 것이고, 오랜 시간 동안 재즈는 교회에서 배척당했다.

 그 외로운 시절이 끝나게 된 건, 구세군과 흑인교회의 가스펠(gospel) 음악의 영향이 크다. 19세기 후반, 구세군은 구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다 ‘도구’라는 입장을 가지면서 길거리 전도를 할 때 대중적인 악기였던 색소폰을 자주 활용했다. 20세기 초, 미국의 흑인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진 가스펠 음악의 세계화는 색소폰의 지위를 완전히 뒤바꿨다. 억압받고 차별받던 이들의 절규와 환희를 담기에 색소폰만 한 악기는 찾기 어려웠고, 이들이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할 수 있는 흑인교회에선 매우 독특한 가스펠 음악이라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해 관능적이고 유혹적이라며 사탄의 악기라고까지 불렸던 색소폰이 “친밀함과 위로”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났지만, 필자는 여전히 생각과 가치관은 그리스도로 오직이 되지 못하여 그릇된 판단을 하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다. 휘장을 찢고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시는데, 구원받은 이방인에게 할례받아야 한다 주장하던 이들과 다를 것 없다.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었는데,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아니냐를 구원보다 중요한 문제인 듯 여기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다. 복음의 능력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정말 세계복음화와 복음에 오직이 되는 것일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그리고 AI 시대가 이미 도래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색소폰’을 맞이할 차례가 되었다. ‘원색 복음’을 후대에 온전히 전달하기 위하여 다소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기독교인이지만, 온전한 복음과 그리스도 이외에는 주장하지 않기로 결단한 바울의 신앙을 가지고 싶다. 음악인에게 음악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새로운 시대가 왔을 때 되려 색깔이 변할까 두려워하되, 복음을 위해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를 더 고민하며 보다 전도에 내 삶이 맞춰지고 싶다.

 2000년대 초에 전국에 인터넷망이 깔리면서 서서히 개인 방송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음을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음지의 문화라 치부하기도 하였지만, ‘유튜브’라고 하는, 이른바 ‘유통의 혁명’이 일어나며 개인 방송 시대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이미 레드오션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문화’라는 것은 레드오션이라는 말로 정의하기 어려운 무언가다. 그저 삶이 되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전도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시대가 변하면서 문화가 변화했고,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이 달라졌다. 그러나 나의 언어는 여전히 10년,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 세계복음화라는 언약을 굳게 붙잡았으나 세계복음화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라의 문을 열어야 하는지까지 기도하지 못했던 나에게 237은, 세계복음화의 대열 속에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기 위한 기회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오직이 되길 기도하지만, 사실 오직이 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며, 전도의 훌륭한 도구가 되고 지금까지도 대중문화의 중심에 있게 된 이방인 색소폰은 오늘날 TCK일 것이다. NCT며, CCK일 것이다.

 그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은 참복음과 세계복음화의 언약잡은 자들을 통해 열리길 기도한다.

[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앞서 7월호에 소개된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들어가는 말’과, ‘I.전도신학의 전제: 개혁주의 정통신학과의 연속성,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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