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목회강단]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계1:1-11)

[전도목회강단]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계1:1-11)

[전도목회강단]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계1:1-11)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에게 어렵고 두려운 책처럼 여겨집니다. 짐승, 환난, 심판, 재앙 같은 상징들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을 주신 목적은 성도들을 두렵게 하거나 종말의 공포를 조장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는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보여 주심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게 하시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재난의 책이 아니라 ‘언약의 책’이고, ‘공포의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권과 교회의 승리를 선포하는 ‘소망의 책’입니다.

   사도 요한은 복음(예수가 그리스도)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실패한 자리요, 갇힌 자리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장차 될 일을 보이시며,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시며, 성령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단순한 미래 예언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 아래 있는 교회의 역사와 세계복음화의 완성을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선언합니다. 이 한 절은 요한계시록의 제목일 뿐 아니라, 이 책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계시”란 인간이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을 스스로 파헤쳐 알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감추어진 구원의 비밀을 열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은 결코 자기 지혜와 노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스스로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의 자기 계시로 시작됩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계시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후손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구약의 모든 제사와 선지자와 왕의 제도를 통해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창세 전에 계획하신 구원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성취된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십자가와 부활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책은 “앞으로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질까?”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까지 누가 왕이신가?”를 선포하는 책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셨고, 부활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며, 승천하셔서 지금도 교회의 머리로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사도 요한의 삶이 바로 이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에베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교회를 돌보던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복음(예수가 그리스도) 때문에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A.D. 95∼96년). 세상은 그를 침묵시키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 유배지에서 요한에게 가장 중요한 계시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은 복음 가진 자의 삶이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세상은 복음 전도자를 묶을 수 있지만, 복음은 결코 묶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교회가 고난당하는 자리에서 더 선명하게 복음을 드러내십니다.

2. 아시아 일곱 교회는 오늘의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며, 세계복음화를 위해 세워진 언약 공동체입니다.

   계1:4절과 11절에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입니다. 이 교회들은 당시 실제로 존재하던 교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말씀을 강론했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행19:10)라고 했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이때 전도 캠프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한 도시의 부흥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말씀 운동이 지역 전체를 살리는 전도, 선교 운동으로 확장되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장소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말씀으로 양육하시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는 선교적 공동체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는 당시 실제 교회였지만 동시에 주님의 승천부터 재림까지 존재하는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예표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곱 교회는 과거의 교회인 동시에 오늘의 교회입니다. 어떤 교회는 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고, 어떤 교회는 환란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으며, 어떤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고, 어떤 교회는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옛날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교회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경의 질문은 훨씬 본질적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붙잡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말씀 중심, 복음 중심, 언약 중심으로 서 있는가?

   우리 교회는 렘넌트를 복음으로 각인, 뿌리, 체질화하고 있는가?

   우리 교회는 237 나라, 미전도 5,000 종족을 향한 세계복음화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3. 복 있는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며, 복음으로 세상을 살리는 증인으로 서는 사람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계1:3)

   여기서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읽는 자, 듣는 자, 지키는 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데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전도 제자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첫째, 복 있는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읽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복음 중심이어야 합니다. 강단에서 복음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하고, 성도는 늘 복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둘째, 복 있는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요20:31 성경 기록의 목적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모든 성경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환란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반드시 복음의 본질을 다시 붙잡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네가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마16:16-17). 예수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복은 영원합니다. 죄에서 건짐 받고, 하나님 자녀가 되고, 성령이 내주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고, 237 나라, 5,000 종족에 복음의 증인으로 쓰임 받는 것이 참 복입니다.

결론: 오늘 계1:1-11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한 언약을 줍니다.

첫째,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둘째, 아시아 일곱 교회는 오늘 우리 교회의 거울입니다.

셋째, 복 있는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며,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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