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영화 ‘킹 오브 킹스’가 넘어선 것, 그리고 놓친 것에 관하여”

‘죄인을 향한 사랑과 용서’
지금은 많이 그 의미가 흐려졌고, 부끄럽지만 ‘이제 더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대중들의 따가운 시선이 있지만, 여전히 기독교를 대표하는 교리로 보는 한 문장일 것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비치고 있는 시대에 한 줄기 빛과 같은 놀라운 작품이 나왔었다. 북미 최초 개봉 이후 미국의 수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고, 찬사받았던 작품. 십수 년 전 신앙인에게 큰 울림을 준 대표적인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물론 감독이 가톨릭신자였기에, 성경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울림을 줬을 뿐.)’ 이후로 이렇게까지 크나큰 반향을 일으킨 기독교 작품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굉장한 흥행을 기록한 영화. 바로 정성호 감독의 ‘킹 오브 킹스’다.
원래 기독교 세계관의 콘텐츠가 나오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교리적인 비난과 비판, 그리고 불매운동이기에 이 작품 역시 비평을 피할 수 없었고, 많은 사람이 이 작품의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도 했다. 배급사가 몰몬교 신자가 설립한 회사라는 점(그로 인해 몰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는 논리다.)이라든가, 원작 소설로 감독이 직접 언급했던 찰스 디킨스(성삼위를 인정하지 않는 유니테리언에 관심이 많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보다 예수님의 인품과 기적, 인간적인 사랑을 중요시한다는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의 이름부터 찰스 디킨스이다.)의 ‘우리 주님의 생애(혹은 우리 주 예수의 생애로 번역된 것들도 있다.)’의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신성보다 인성 중심의 작품이라는 점 등등 다양한 비판이 쏟아졌다.
노이즈 마케팅이라 하였던가, 작품의 영향력으로 문제가 될까 봐 시청반대 운동을 하던 사람들로 인하여 이 영화는 쉴 새 없이 미디어에 언급이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비판과 원작자의 신앙에 대한 의심들을 잠재울 만큼 어마어마한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수많은 기독교 채널 및 일반 언론과 예능 프로그램 등에서 ‘승리자’로서의 인터뷰를 하며, 모든 부정적 여론을 일축했다. 개인적으로 지난 십수 년 동안 나온 기독교 세계관의 영화 중에선 단연코 세 손가락에 꼽힐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루겠지만 영화 노아(2014), 엑소더스:신들과 왕들(2014), 선 오브 갓(2014) 등의 작품을 보면 성경이라는 소재로 재해석이 아닌 왜곡된 작품들이 줄지어 나왔던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 귀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기독교적인 영화가 흥행을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면서, 그 세계관을 의미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영화(대표적으로 ‘나니아 연대기(2005)’, ‘일라이(2010)’가 있다.)로 대중들에게 복음적인 콘텐츠를 전달한 것에 반해, 성경의 주인공 그 자체인 예수님을 소재로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적인 흥행을 했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도저히 넘어가기 어려운 몇 가지 작품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그중 세 가지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먼저, 작중 후반부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된 이유를 이야기하며 이른바 ‘창 3장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창세기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뱀의 속임으로 인하여 여자와 남자가 먹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서 가장 문제가 된다고 느낀 부분이 있는데, 뱀이 여자에게 열매를 건네주며 먹으라고 하는 장면이다. 실제 성경에서 뱀은 여자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4-5).
뱀은 여자에게 이 열매를 먹으면 죽지 않는다고 했으며,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뱀은 이 무대에서 살짝 뒤로 빠진다. 여자가 스스로 결정하고 먹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창3:6).
이 장면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관객의 해석은 매우 크게 달라진다. 지금 영화에서 연출한 장면으로 보게 되면 ‘사단이 잘못했고, 인간은 피해자’인 것처럼 해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내용 그대로를 담았다면 전혀 다른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인간이 죄를 지었다’라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죄인이 된 것’과 ‘자신의 결정으로 죄인이 된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물론 죄의 기원은 사단이다. 사단으로부터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게 된 것은 맞지만, 그 죄를 지은 주체가 옛 뱀 곧 마귀가 아니라 인간이었음을 결코 놓쳐선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피해자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연출과 해석을 한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담에게 열매를 먹었는지 물었을 때 되려 아담이 하나님과 여자를 원망하며 자신의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본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이어서 나오는 부분인데,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어 수많은 ‘죄’를 짓고 살게 된다고 나온다. 그리고 ‘그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되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말한다. 마냥 잘못됐다고 보긴 어렵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인간의 ‘자범죄’ 때문이라는 해석을 벗어날 수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하여 선악과를 먹게 된 사건에서 다뤄야 할 것은 ‘원죄’였으며, 그 원죄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직접 오시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메시아로 오셨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로 흘러가야 했다. 사람들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그 원죄로 인해 파생된 자범죄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면, 아마 연출적으로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대판 구원의 길’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작품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장면일 것이다. 수도 없이 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고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봤지만, 여전히 눈물이 나오게 되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다 끝났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제일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에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요19:30)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신 듯한 분위기로 ‘다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역시도 굉장히 다른 뉘앙스를 전달한다. 당연히 단순히 시간의 끝이나 고통의 마무리를 하는 듯한 ‘다 끝났다’가 아닌, 인간의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시고 구원사역을 완성하셨으므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도 변론을 해 보자면 북미 개봉 당시 영어로 더빙했던 작품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It is finished’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해서 ‘다 끝났다’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를 최대한 역사적·성경적 고증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이 보였던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 고증의 노력이 결정적인 장면에 닿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다. 감독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구원을 위한 여정이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예언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한 조각으로서 십자가에 오르셨다는 의미는 흐려지고, 힘들었던 성육신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광명을 찾은 듯한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 점은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 외에도 더 많은 부분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고 대중적으로 함께 보자고 말할 수 있을 법한 기독교 콘텐츠가 나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콘텐츠라는 것은 그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콘텐츠에서 부족한 것은 현장의 메신저로서 채워주면서 올바른 그리스도를 전달하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앞으로 237, 5000 종족에 복음을 증거하고 세계복음화의 주역으로 나아가게 될 렘넌트들과 모든 복음 가진 성도들이 앞으로 더 멋지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는 복음 콘텐츠가 만들어지길 기도하게 된다.
끝으로 한 가지 나누고 싶은 포럼 주제가 있다. 서문을 열었던 기독교의 대표적 교리인 ‘죄인에 대한 사랑과 용서’라는 문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죄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원죄’가 먼저 떠오르는가, 아니면 ‘자범죄’를 떠올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