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앞서 7월호에 소개된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들어가는 말’과, ‘I.전도신학의 전제: 개혁주의 정통신학과의 연속성, II. 전도신학의 두 기둥: 성경과 전도’는 7월호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Ⅲ. 전도신학의 신학 구조 : ‘이미’와 ‘아직’의 구조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면서도 전도에서 중요한 용어가 있다면 “모든 문제 끝났다”라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실제 현장의 전도 과정에서 매우 힘 있는 용어이다. 그런 맥락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 해결자”가 되는데, 이 표현은 아마도 다락방 전도운동 안팎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받는 표현일 것이다. 밖에서는 예수 믿는다고 금방 “어떻게 모든 문제가 해결되느냐”고 묻는 반면,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이미 구원받았으니 삶은 어떠하든 상관없다”라고 한다. 전자는 칭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이고, 후자는 성화와 관련된 오해에서 비롯된 태도인 것이다. 둘 모두 다락방 전도신학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보여준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구원론적 왜곡, 즉 성화 없는 칭의(율법폐기론)나 칭의 없는 성화(율법주의/공로주의)의 전형적인 변형이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1938)에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중 칭의와 성화는 논리적으로 구별되나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임을 밝히며, 이 둘의 균형을 상실할 때 교회가 영적 타락에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다락방 전도운동에서 “모든 문제 끝났다”는 선언은 사실은 신학적 사변이 아닌, 신학의 핵심적 균형을 현장 전도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1. 이미(Already): ‘다 이루었다’의 칭의론적 구조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표현의 뿌리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⁵에 기반한다. 예수님께서 대속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완성하셨다는 의미이다.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다 대속하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칭의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 진영 내의 일부 신학에서 주장하듯 인간의 실천을 통한 의의 양을 증가시키는 ‘공로적’ 성격을 처음부터 배제한다. 성경적으로 히브리서 10장 14절(“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은 칭의의 단회성과 영원한 효력을 증명한다.

[⁵ ‘다 이루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텔레스타이(τετέλεσται)는 ‘끝나다’, ‘완성하다’, ‘성취하다’를 뜻하는 ‘텔레오(τελέω)’의 3인칭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그것이 성취되었다’라는 의미이다(『카리스 종합주석 11』, p. 360). “이 말씀에 의해서 율법의 모든 의식이 철폐되는 것이다”(『칼빈주석, 요한복음②』, 서울: 다온, 2014, p. 120). “이 말씀은 성부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담당하는 일이 이제 완료되었음을 선포한다. 이는 죄에 대해 치러야 할 형벌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ESV 스터디바이블』, 신지철 외 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4, p. 2105).]

또한 대륙 개혁교회의 역사적 표준문서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 1563) 제60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만족과 의와 거룩함이 나에게 전가(Imputation)되어, 마치 내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여겨 주신다”고 명시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제11장 1항 역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의 신앙 행위나 인간적 행위를 의로 여겨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죄만을 전가하신다”고 명문화함으로써 인본주의적 공로 사상을 엄격히 배제한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믿는 자들에게 전가됨으로써 죄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이해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이러한 칭의 이해를 이론적인 확정에 머무르지 않고 전도 현장으로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는 정통 개혁주의 칭의론 자체가 갖는 폭발적인 잠재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문제를 끝내셨다”라는 선언이 나올 수 있었고,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고백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모든 문제 끝났다”라든지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선언은 어디까지나 ‘칭의론’이라는 틀 내에서 주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의 범위를 무한정 확장할 경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가 생겨난다. 그럴 경우, 칭의론이 성화론까지 흡수해 버리는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칭의 이해가 칭의 영역을 넘어 지나치게 확장되어 성화론이 칭의론에 흡수되거나 칭의론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이 고개를 든다. 이미 영원적 칭의가 이루어졌으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 구원의 서정에서의 믿음 등은 이미 완성된 칭의를 위한 요식 행위로 그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락방 전도운동이 말하는 전도신학이 아니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역시 그의 저서 『개혁교의학』 제4권에서, 개혁파 신학자들은 칭의에 대한 영원한 작정과 시간 속에서의 그 작정의 시행 사이를 구별했다고 분명히 밝힘으로써⁶ ‘영원한 칭의’ 개념을 분명하게 반대한다. 다락방 전도신학 역시 율법폐기론으로 기우는 은혜의 남용을 철저히 경계한다.

[⁶ Herman Bavinck, 『개혁교의학 4』(2017), p. 252.]

다락방 전도신학은 칭의론을 전도 과정에서 실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듣고 해방되는 체험을 하게 한다. 그러나 칭의를 통한 해방은 구원의 서정에서 ‘시작’일 뿐이다. 그러기에 칭의가 성화를 덮어 버리거나 흡수해 버리는 위험은 절대로 피해야 하는 것이다. 성화 없는 칭의는 율법폐기론으로 기운다. 반대로 칭의가 성화론으로 흡수될 경우, 로마 가톨릭처럼 구원론에서 공로주의가 들어오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율법폐기론이나 공로주의는 성경적이지도 않고, 다락방 전도신학과도 거리가 먼 치명적인 신학적 오류인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모든 문제 끝났다”는 칭의론에 내포된 “이미(Already)”의 구조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것이 갖는 신학적 함의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문제 끝났다’는 칭의의 적용적 선언은 현장에서 성도들과 복음을 처음 듣는 사람들에게 참된 해방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그것은 ‘칭의’가 주는 핵심적 유익이기도 하다. 루터가 실존적 곤경 속에서 로마서 1장 16-17절을 통해 복음의 해방을 경험하고 이신칭의를 주창한 바와 같이, 법정적 칭의는 구원의 전 과정 속에서 확정적 사건인 ‘이미’의 단계를 형성한다. 다락방 전도신학은 그 지점을 아주 명확하고 확실하게 수용·적용하였고, 전도 현장과 목회 현장에서 강력하게 실행하는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도신학이 갖는 ‘이미’의 국면이다.

2. 아직(Not Yet): ‘각인 뿌리 체질’의 성화론 구조

그러나 다락방 전도신학은 칭의가 갖고 있는 ‘이미’의 구조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난 30여 년 동안 복음을 ‘각인, 뿌리, 체질’화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함으로써, 성화의 필요성을 피력해 왔기 때문이다. 특히 ‘3오늘(오늘의 말씀, 기도, 전도)’, ‘전도자의 삶’은 칭의 이후의 삶, 곧 성화의 국면에 맞춘 주요 개념 틀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문제 해결자’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된 신분임을 밝히면서, 동시에 평생 동안 변화가 필요한 상태라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서정에서 칭의 이후 성화의 필요성을 매우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성화의 ‘아직(Not Yet)’의 구조를 잘 보여준다. 존 칼빈(John Calvin)도 평생 회개의 과정이 뒤따라야 할 것을 강조한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3장에서 신자의 삶을 ‘평생에 걸친 회개와 자아 부인’으로 규정하며, 성화는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정욕을 매일 죽이고 영을 살리는 점진적인 과정임을 분명히 했다. 개혁파 신학 역시 회개는 이생에서 완성할 수 없는 평생의 과업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3장 2항 역시 “이 성화는 신자의 전 인격에 미치나 이생에서는 불완전하여 육신의 정욕이 여전히 남아 있어 평생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 일어난다”고 서술한다. 이는 성경 골로새서 3장 9-10절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에 근거한 것으로, 다락방 전도신학의 ‘각인, 뿌리, 체질’ 패러다임은 이 점진적 성화와 회개의 개혁주의 교리를 현장 언어로 탁월하게 적용한 결과물인 셈이다.

다락방 전도신학 역시 이 점을 분명히 수용하여 각인하기, 뿌리내리기, 체질화하기를 지속해서 강조해 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락방 전도운동은 사실상 성화운동의 황금밭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선언은 칭의의 완전한 전가적 특성, 곧 “이미”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각인, 뿌리, 체질을 바꾸는 것과 3오늘의 삶은 평생에 걸쳐 계속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성화적 요소인 “아직”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이미’와 ‘아직’은 성경 전체의 구조적 특성이기도 하며 개혁주의 신학의 특성이기도 하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이 점을 전도 현장에 구체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전도운동과 신학의 완전한 일체화를 성취하고 있다. 이론과 실제를 일체화하는 것이 다락방 전도신학의 본질적 특성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신학을 회복하고 복음을 회복한 것은 교회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과연 개혁주의 신학이 전도 현장과 선교의 실제적 회복이라는 면에서는 충분한가라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과 현장의 일체화가 부족했다는 말로도 바꾸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열기가 사그라들고 17세기 정통주의 시대로 이행하면서, 신학은 점차 상아탑의 논쟁 도구로 변질되었고 교회와 성도들의 실제 삶이라는 현장성과는 괴리가 커졌던 것이다. 이로 인해 교리는 정교해졌으나 교회 현장을 실제로 돕고 살리는 동력은 상실되고 만 것이며, 당연히 전도와 선교와는 접점이 없는 현장성 없는 신학이라는 현상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다락방 전도신학은 개혁주의의 신학적 유산을 단순한 신학 이론이 아니라, 매일의 삶과 전도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실천적 교리로 일체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다락방 전도신학은 개혁주의 신학 유산과의 연속성 속에서, 현장을 살리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개혁성과 확장성을 동시에 지닌다.

오늘날 유럽 교회가 신학은 발전시켜 오면서도 정작 교회는 문을 닫는 역설적인 상황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신학과 현장의 분리이다. 신학은 이론적으로 계속 발전시켜 오면서도 현장 문제에 충분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실제로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매뉴얼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의 전도신학은 이 지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앞서 본 것처럼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를 구조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와 ‘아직’을 단순한 신학 이론이 아닌, 전도 현장과 목회 현장에 철저하게 적용함으로써 신학과 현장이 분리되지 않고 일체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학과 현장의 일체화, 바로 이것이 다락방 전도신학의 가장 두드러진 본질이요, 큰 기여점이다.

3. 순례자의 신학⁷

[⁷ ‘순례자의 신학’이라는 용어는 낯선 것은 아니다. 현대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마이클 호튼(Michael Horton)의 저서 *Pilgrim Theology: Core Doctrines for Christian Disciples* (2013)에 나오는 용어이다. 필자는 그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다락방 용어 자체로 이미 ‘남은자-순례자-정복자’의 용어에 ‘순례자’가 나온다. 필자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특히 ‘칭의의 완료성’과 ‘성화의 점진성’이라는 두 가지 빛에서 다락방 전도신학은 가장 잘 이해가 될 것으로 보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 곧 칭의의 완료성이란 “모든 문제 끝났다”라는 것은 칭의의 완료성을 전도 현장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것으로, 다락방의 상징어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동시에 다락방에서 강조하는 ‘3오늘’과 ‘각인 뿌리 체질’은 성화의 점진성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다락방의 신학적 필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다락방 전도신학은 칭의의 완료성과 성화의 점진성을 극명하게 구조적으로 잘 지탱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례자의 신학’이라고 명명하려고 한다.]

‘이미’와 ‘아직’의 구조적 특성을 바탕으로 신학과 현장, 이론과 실제의 일치를 지향하는 다락방 전도운동은 지금 역동적인 7·7·7 망대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 망대운동이 보여주는 구체적인 전도신학적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1) 성경중심적 신학

망대운동은 그리스도가 주신 망대, 여정, 이정표(7·7·7)를 기반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3절기(유월절, 오순절, 수장절)의 다른 표현이고, 사도행전 1장 1-8절에 그 원천을 둔 개념이다. 사도행전 1장 1절(오직 그리스도), 3절(하나님 나라의 일), 8절(성령 충만과 세계 복음화)은 신구약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언약의 집약체이다. 구약의 3절기, 즉 유월절(구원과 칭의), 오순절(성령의 인도와 성화), 수장절(천국 배경과 영원한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교회의 여정을 나타낸다. 망대운동은 이 성경적 구속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으로, 어떤 인위적인 프로그램이나 방법이 결코 아닌 것이다. 다락방 전도운동은 사람이 전체 과정을 기획하고, 그에 따른 방법론을 고안하고, 효력을 극대화시키는 인본주의적 전도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며, 철두철미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 말씀의 절대적 권위 위에서, 그리고 성령의 완전한 인도하심 속에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경륜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어 나간다. 다락방 전도신학은 철저히 구원 중심적이고 성경 중심적인 신학을 구성한다.

2) 삼위일체론적 신학

다락방 전도운동의 전도신학은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갖는다. 망대운동의 3중적 구성 요소인 망대, 여정, 이정표는 모두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을 전제한다. 다락방 전도운동의 핵심적인 얼개는 앞선 단계들을 뒤에 나타나는 전략들이 수용 및 종합하면서 새롭게 발전하는 형태로 계속 진화해 왔다. 이를테면 다락방 다섯 기초가 20가지 전도전략으로, 그것을 통합하고 확장한 것이 “62가지 전도자의 삶”이다. 이것은 최근 7·7·7 망대운동의 형태로 종합·승화되어 나타난다. ‘7망대’, ‘7여정’은 성삼위 하나님으로 시작하며, ‘7이정표’ 구성 역시 갈보리산(그리스도), 감람산(하나님 나라), 마가다락방(성령)의 삼중적 구조로 시작되고 있으며, 이는 삼위일체론적 특성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다락방 전도신학이 철저히 개혁주의 신학에 충실함을 잘 보여준다. 개혁주의 신학은 철저히 삼위일체 중심적(Trinitarian)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3항은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적 통일성과 사역적 구분을 명시한다. 이는 구원의 계획(성부), 구원의 성취(성자), 구원의 적용(성령)이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구조에 완벽하게 호응한다. 그런 점에서 망대운동은 철저히 성삼위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에 기반을 둔 신학적 운동이다.

3) 교회를 위한 신학

다락방 전도신학에서 교회는 세상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플랫폼이다. 교회는 영적 플랫폼이고 파수대이자 영적 안테나가 되어, 세계를 살리고 네피림 문화를 치유하는 출발점이 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 1장에서 교회를 ‘모든 신자의 어머니’로 부르며 교회론의 중요성을 극대화했다. 에베소서 1장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는 말씀과 같이, 교회는 세상의 타락한 문화(네피림 문화)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하는 우주적 기관이다. 망대운동이 교회를 영적 플랫폼, 파수대, 안테나로 정의하는 것은 교회를 통해 시대를 치유하시려는 하나님의 교회론적 경륜을 현장감 있게 나타내는 것이다.

4) 문화 변혁 운동으로서의 세계관적 신학

망대운동은 단순한 양적 부흥운동이나 일시적인 전도운동이 아니다. 3뜰(이방인의 뜰, 기도의 뜰, 아이들의 뜰) 시대, 금토일 시대, 묵상 시대는 세대를 아우르며 전 세계 문화권을 회복하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것은 237나라 5천 종족 복음화라는 큰 지구적·우주적 틀에서 진행되는 문화 변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와 헤르만 바빙크가 주창한 개혁주의 문화관 및 전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 선포 사상과 직결된다. 카이퍼가 그의 『칼빈주의 강연』(Stone Lectures, 1898)에서 주장했듯이, 기독교는 종교의 영역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정치, 사회, 문화, 교육)을 복음으로 변혁해야 한다. 망대운동의 3뜰 시대와 금토일 시대와 묵상 시대는 카이퍼 이론의 가장 효력 있는 실현 매뉴얼이 될 수 있으며, 세속화된 현대 문화 속에서 후대들의 영성과 삶의 양식을 복음적으로 재구성하려는 개혁주의적 문화 변혁의 시도이다.

5) 전도, 선교 중심적 종말론 신학

종말론을 불건전하게 강조하는 곳에서는 전도와 선교가 사라지고, 개인 성결에 치중하게 되며, “휴거”와 분리를 강조하여 사회생활과 세상에 적극적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수동적 기다림의 신학이 되고 만다. ‘신부’로서의 정결을 강조하는 나머지 개방적이기보다는 폐쇄적이고, 사회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신들만의 특수한 공동체를 형성하며, 정상적인 일상생활과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도피하려는 성향이 나타난다. 극단적으로는 불건전한 종말론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락방 전도신학은 종말의 주체는 환난도 전쟁도 아닌 오직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심을 인식한다. 종말은 그 어떤 특수한 성경 해석에 근거한 율법시대로의 퇴행도 아닌,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는 약속에 근거한 철저히 성경적 종말 이해에 근거하고 있음도 분명히 한다. 이는 다락방 전도신학이 종말 이해에 있어서도 개혁주의 신학과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개혁주의는 시한부 종말론이나 휴거론을 중심으로 한 현실 도피적 세대주의 종말론을 철저히 거부한다. 성경적 종말론은 성도에게 두려움이나 고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매일의 삶의 현장 속에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다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다락방 전도신학은 바로 이러한 선교와 함께 오는 종말에 초점을 맞춘 지극히 건강하고 정통적인 종말론 신학 구조를 지향한다.

나오면서

필자는 지금까지 다락방 전도신학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유산 위에서, 신학은 세련되고 전문화된 지식과 이론을 넘어 신학 또는 교리를 현장의 삶과 일체화시키려는 역동적인 신학실천 운동임을 밝혔다. 이 신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경중심주의, 그리고 개혁주의 5대 강령(TULIP)을 고스란히 계승한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다. 결코 정통 교리를 부정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개혁의 견고한 토대 위에 ‘현장 전도와 성령의 역사’라는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대원칙을 오늘날의 현장에서 분명하게 실천적으로 증명해 내고 있다.

다락방 전도신학은 구원론의 종말론적 긴장인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균형을 칭의와 성화에 대입하여 현장 전도 언어로 탁월하게 구현해 낸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뿌리를 둔 “모든 문제 끝났다”의 칭의적 의미는 인본주의적 공로 사상을 배격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의롭다 함을 얻은 칭의의 완전성, 곧 ‘이미’의 해방을 선포한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율법폐기론(Antinomianism)적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다락방 전도신학은 일생에 걸쳐 복음을 ‘각인, 뿌리, 체질’화하는 점진적 성화의 과정, 즉 ‘아직’의 구조를 견지한다. 특히 ‘3오늘’을 통해 실현되는 ‘전도자의 삶’에 대한 강조는 칭의가 성화를 삼켜 버리거나, 그 반대로 성화가 칭의를 흐리지 않게 만드는 정통 개혁주의 구원론의 온전한 실현에 다름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최근 역동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7·7·7 망대운동’은 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균형 속에서 생겨난 구체적인 열매다. 사도행전 1장과 구약의 3절기를 관통하는 철저히 성경 중심적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에 기반한 신학 구조, 세상을 살리는 플랫폼으로서의 현장 중심적 교회론은 다락방 전도운동의 기초가 얼마나 개혁주의 신학의 정신에 부합되는지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의미를 더욱 심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다락방 전도신학은 3뜰 시대와 금토일 시대, 묵상 시대를 통해 시대와 세계와 문화를 치유하고 살리려는 시도를 보이는데, 이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창했던 ‘모든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 선포’, 곧 문화 변혁 운동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효력 있는 기독교 세계관으로서의 면모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다락방 전도신학은 현실 도피적인 시한부 종말론을 배제하고 마태복음 24장 14절에 근거하여 237나라와 5천 종족 복음화라는 선교적 완성 속에서 재림을 기다리는 건강한 종말론적 구조를 지닌다.

끝으로 다락방 전도신학은 현대 유럽 교회가 겪은 쇠퇴의 원인인 ‘신학과 현장의 분리’라는 구조적 문제를 ‘복음과 전도’라는 두 기둥으로 극복해 내고 있다. 정교한 이론체계는 구축했으나 실제로 교회를 살릴 수 없는 신학, 전도와 선교를 위한 현장성을 잃어버린 신학을, 다락방 전도신학은 매일의 삶과 전도 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살아 있는 신학’으로 전환하고 있다. 이는 다락방 전도신학이 지닌 진정한 신학적 의의이자 기여점이다.

오수영 목사(지구촌선교교회)(Ph.D)(RTS 조직신학 담당)

[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칼럼] 다락방 전도신학 이해 오수영 목사(지구촌선교교회)(Ph.D)(RTS 조직신학 담당) 들어가면서 본 글은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난 신학을 ‘전도신학’으로 명명한다. 다락방 전도운동에 나타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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